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로코트니차 전투 (문단 편집) == 이후 ==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뒤 평화 협약을 어기고 침략한 죄를 물어 테오도로스를 실명시키고 타르노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한편 포로로 잡은 약 2만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아무 조건없이 즉시 석방하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민심을 확보했다. 이후 그의 군대가 이피로스 영토를 침공하여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프릴리프, 세레스, 아드리아노폴리스, 데모티카, 플로브디프 등지가 불가리아에 넘어갔고, 테살리아의 대 블라키아도 함락했으며, 과거 보릴에게 반기를 든 뒤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시오스 슬라브의 체피나 성도 공략했다. 테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가 된 마누일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불가리아의 봉신이 되었다. 아센은 정복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중요한 요새에 배치하고 부하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과거 [[칼로얀]]이 정복지 주민들을 학살하다가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샀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 관료들이 계속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고 백성들을 가급적 해치지 않았다. 포로 석방 및 기존 체제 유지 정책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그를 공정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여겨서, 크게 저항하지 않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그는 타르노보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금화를 주조하였고, 성 순교자 성당을 세우고 성당의 기둥 중 하나에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및 다른 종족의 차르"라고 알리는 글귀를 새기게 하였다. 또한 동로마 황제를 모방하여 황제의 휘장을 갖추는 등 장차 발칸 반도 전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 후 이반 아센 2세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3세]]를 상대로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맞서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손아귀에 넣고자 노력했다. 한편, 불가리아군에게 사로잡힌 뒤 실명한 채 7년간 타르노보 감옥에 갇혀있던 테오도로스는 1237년 이반 아센 2세가 자신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거지로 위장하여 테살로니키로 들어온 그는 옛 지지자들과 접촉하여 마누일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그는 실명된 상태였기에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황제로 앉히기로 했다. 음모는 성공했고, 마누일은 퇴위된 뒤 소아시아의 아탈리아로 유배되었다. 아들 요안니스는 예정대로 테살로니키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테오도로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마누일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탈리아에서 탈출한 뒤 니케아 제국에 망명했고, 1239년 초 6척의 니케아 함대를 이끌고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인근에 상륙했다. 이리하여 내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르렀지만, 양자는 곧 테살로니키 일대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마누일은 니케아 제국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테살리아를 받았고,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를 지켰다. 1241년 마누일이 죽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본토를 다스리고 있던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테살리아를 공략하려 했다. 이에 테오도로스는 1241년 니케아를 방문해 구원을 청했다. [[요안니스 3세]]는 그를 삼촌으로서 후한 대접을 해줬다. 그러나 니케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그 사이에 테살로니키를 향한 원정군을 준비했다. 1242년 봄,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를 대동한 채 원정군을 이끌고 테살로니키로 진격했다. 니케아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소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요안니스 황제는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비밀로 하고, 협상을 위해 테오도로스를 도시로 보냈다. 40일간의 협상 끝에, 테오도로스의 아들 요안니스는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았지만,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에서 아들 곁에 머물 수 있었다. 그 후 보데나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244년 아들 요안니스가 죽자 작은 아들 데메트리오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테살로니키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걸 즐기는 방탕한 청년이었고, 시민들은 니케아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원하기 시작했다. 1246년 가을, 요안니스 3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트라키아의 대부분과 마케도니아 동부 및 북부 전역을 장악했다. 그 후 멜니크에 주둔한 요안니스 3세는 테살로니키 주민들로부터 데메트리오스를 축출하고 도시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황제는 데메트리오스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데메트리오스는 낌새를 눈치채고 거부했다. 황제는 소환령에 불응한 신하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테살로니키로 진군했고, 며칠 후 음모자들이 성문 중 하나를 열면서 도시가 손쉽게 공략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체포된 뒤 비티니아의 렌티아나로 유배되었다. 이때 테오도로스는 보데나에 은거하는 조건으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테오도로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요안니스 3세에 대항하라고 촉구했다. 미하일 2세는 삼촌의 권유를 받아들여 1251년 봄 테살로니키를 급습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테오도로스는 미하일 2세와 합류한 뒤 1252년 봄 프릴레프와 벨레스를 공략했지만, 요안니스 3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피로스로 철수했다.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의 거점이던 보데나를 공략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이피로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피로스군의 요안니스 글라바스와 테오도로스 페트랄리파스 장군이 니케아 제국에 귀순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고, 미하일 2세는 요안니스 3세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이피로스군이 장악한 요새와 마케도니아의 나머지 영토를 양도하였고, 미하일 2세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이 이뤄졌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 2세에게 테오도로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미하일 2세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압력에 굴복하여 테오도로스를 넘겨줬다. 테오도로스는 소아시아로 끌려갔고, 1253년경 그곳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분류:로마-불가리아 전쟁]][[분류:이피로스 전제군주국]][[분류:지상전]][[분류:13세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